
84JOJO
5시간 전
자아(Ego)는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Self)과 멀어진다
─ 『싯다르타』가 묻는 축적과 비움의 역설
1.서론ㅡ타이틀이 이미 답이다
타이틀 자체가 명제다. 자아는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배운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지식, 더 나은 이미지. 그런데 역설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채울수록 정작 나 자신과의 거리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드러낸다.
나는 지금까지 그 모순을 느껴왔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나은 정보를 얻고, 더 좋은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 했다. 일을 하면서 자격증을 따고, 책을 읽고,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AI 시대가 오자 더욱 그랬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깨달았다.
이 모든 욕망과 소유가 나를 나 자신에게 더 가깝게 만드는가?
2.본론1ㅡ첫째, 자아(Ego)와 자기(Self)는 다르다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 시작된다. 한국어에서 '자아'와 '자기'는 거의 같은 말처럼 쓰인다. 그래서 '자기를 찾는다'고 할 때 '자아를 찾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다르다.
만들어진 자아(Ego) ≠ 근원적 자기(Self)
이것이 타이틀을 푸는 핵심이다.
자아(Ego)는 무엇인가. 욕망, 두려움, 경쟁, 비교, 평가로 만들어진 일상적 자아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가 누구보다 앞서 있는가 하는 질문들에서 만들어진다.
자아의 특징은 단 하나다. 계속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인정, 더 나은 이미지. 자아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끝없이 밖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밖에서 가져와야만 완성된다고 믿는다.
반면 자기(Self)는 무엇인가. 싯다르타가 찾으려는 아트만, 근원적인 자기다. 이미 내 안에 있지만 자아의 소음 속에서 들리지 않는 깊은 목소리다. 따라서 타이틀의 명제는 이렇게 읽힌다.
자아가 계속 채워질수록, 자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욕망의 소음이 클수록 근원적인 물음의 침묵이 들리지 않는다. 밖에서 가져오는 것들로 자아가 부풀어오를수록, 그 아래 있는 진정한 나는 더 깊이 묻혀간다. 이것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멀어진다'는 말의 의미다.
3.본론2ㅡ둘째, 왜 우리는 계속 채우려고만 할까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그랬다.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계속 찾았다. 사문의 길을 걸었고, 쾌락의 길을 걸었고, 부의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아버지가 날마다 죄업을 씻고, 날마다 자신을 정화하고,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의 내면에 근원적인 자기(자신의 진정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이 질문은 뒤집혀 있다. 아버지는 충분히 수행했지만 여전히 더 채워야 한다고 느낀다.
자아는 아무리 채워도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지식을 얻으면 그만큼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열 권을 읽고 싶어진다. AI에게 한 번 질문하면 계속 다른 각도에서 질문하고 싶다. 정보의 시대가 이것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좋은 정보를 얻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그래서 채우는 것이 의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 한 번의 질문으로 엄청난 정보가 쏟아진다.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더 많이 채우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자아는 여전히 '더 많이'를 외친다. 하지만 그 '더 많이'가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깝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멀어진다.
왜 그런가?
채우는 행위 자체가 자아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4.본론3ㅡ셋째, 깊어짐의 길은 비움뿐이다
싯다르타가 명상을 하고, 굶주림과 갈증을 견디며 자기 초탈을 시도하는 것을 보면 고통을 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오독이다. 그가 하는 것은 자아의 끊임없는 욕망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이다.
비움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라고 착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다.
직함을 빼면 나는 누구인가.
돈을 빼면 나는 누구인가.
학위를 빼면 나는 누구인가.
남들의 평가를 빼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배운 지식을 빼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들을 계속하면서 걷어내다 보면, 자아가 본인이라고 착각한 모든 것이 벗겨진다.
그 아래에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자기다. 아트만이다. 근원적인 자신이다.
역설은 여기에 있다. 더 많은 것을 채워서는 절대 자기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채움의 과정 자체가 자아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더 많은 정보를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순간, 그것은 이미 자아의 작업이 된다.
따라서 깊어짐의 길은 오직 하나다. 비우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자아(Ego)는 자꾸만 '더 많이'를 원한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성공, 더 많은 인정.
자기(Self)는 '무엇이 진짜인가'를 묻는다.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아(Ego)가 커질수록 자기(Self)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이것은 우리가 더 많이 채울수록 우리는 더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5.결론ㅡ배움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나는 계속 책을 읽을 것이고 AI에게 질문할 것이다. 『싯다르타』가 배움을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르게 배우라는 뜻이다. 배우되, 배운 것을 최종적인 답으로 착각하지 말 것. 정보를 얻되, 그것이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지식을 쌓되, 그것이 나라고 믿지 말 것.
그래서 앞으로 나는 세 가지를 실천하려 한다.
첫째,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을 구분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내가 경험한 것인지, 아니면 책이나 전문가나 AI를 통해 알게 된 것인지. 이것을 명확히 할 때만 자아의 착각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다.
둘째, 누가 말했는가보다 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지를 확인한다.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거나 AI의 논리적 설명이라도, 나의 사고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자아를 내 것 위에 얹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셋째, 답을 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기화한다.
정보를 이해하고, 현실에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성찰한 뒤 나의 판단 기준으로 만든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정답 모음집'이 아니라 '판단 기준'이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AI 시대에는 정답이 더 이상 희소한 자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AI가 발전할수록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정보와 답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차이는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그 많은 답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의심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것인가. 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비우는 능력이 필요하다.
남의 권위를 비우고,
이미 정해놓은 결론을 비우고,
내가 옳아야 한다는 욕망을 비우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마음을 비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 남에게서 얻은 지식은 비로소 나의 판단으로 바뀐다.
그래서 타이틀의 명제를 다시 읽는다. 자아(Ego)는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Self)과 멀어진다.
이제 이 말이 이해된다.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초대다. 자아(Ego)가 채우는 길을 멈추고, 비워서 자신의 자기(Self)를 만나자는 초대.
그리고 그 만남은 더 많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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