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페로
4시간 전
달러 이전, 지배통화의 역사 — "A Brief History of Global Anchor Currencies"
미국 달러가 어떻게 글로벌 무역의 지배통화로 등극했는지에 관한 글을 준비중에, 아주 재미있는 글을 찾아서 소개해드립니다. 제목은 <A Brief History of Global Anchor Currencies>로 도이체방크 글로벌 전략가였던 산지브 신얄이 기재한 컬럼입니다. 달러 이전 시대의 지배 통화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아래 글을 읽고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지배통화의 지위는, 발행국의 글로벌 패권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지배통화의 등극과 퇴장역시 발행국의 패권이 지속되느냐에 달려있었다.
- 인플레이션은 자본주의가 구축된 현대에서만 발생한 현상이 아니었다.
* 금,은 등 실물화폐를 사용하던 시기에는 로마처럼 인도와의 막대한 무역적자와 전쟁경제에 의존하던 결과 재정적자의 악화를 만화하기 위해 화폐에 구리나 주석을 섞으며 양화를 악화로 대체함으로써 발생하기도 했다.
* 더불어,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 세계적으로 금과 은의 유통량이 증가함에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 금본위제의 가장 큰 한계는 경제성장에 비례에 금의 유통량이 증가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다행히 영국이 세계를 재패하던 1800년대에는 잇따른 금 발견으로 금 유통량이 경제성장률을 따라갈 수 있었다.
- 부채와 신뢰상실이 촉발한 통화체제의 위협은 그야말로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다. 무분별한 부채발행으로 재정건전성에 대한 빨간불이 곳곳에 들어와 있는 현대의 자본주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인도인이 로마의 악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듯, 현대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지난 100년간 가치가 산산조각난 달러를 기꺼이 보유한다. 이는 경제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살아숨쉬기 위해서는 유동성이라는 혈액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야하기 때문이다.
**슈페로 생각**
재정적자의 심화는 통화의 가치 하락의 악순환을 낳는데, 무한히 악화를 늘리는 것은 화폐가치를 0으로 수렴하게하는 행위가 아닐까? 로마와 스페인은 그 끝에 결국 파산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미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더 이상 달러 가치를 스스로 박살내는 행동을 멈추고, 그 가치를 회복시키는 길만이 자본주의를 지속가능한 체제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A Brief History of Global Anchor Currencies"
The Globalist, 2012.5.24 — 산지브 산얄(Sanjeev Sanyal)
역사상 국제통화체제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주요 경제국 — 대개 그 시대의 최강대국 — 이 자국의 신뢰도를 내주는 대가로 세계에 통화 앵커(anchor)를 제공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앵커 국가와 나머지 세계 사이에 공생 관계를 만든다. 앵커 국가는 값싼 자금조달을 얻고, 나머지 세계는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돌리는 데 필요한 통화 유동성을 얻는다.
예컨대 로마 시대의 세계 경제체제는 로마 제국과 고대 세계의 수출 챔피언이었던 인도 간의 활발한 교역이 떠받치고 있었다. 상선들은 홍해나 페르시아만을 따라 내려간 뒤 몬순 바람을 타고 아라비아해를 건너 인도로 향했다.
그러나 인도-로마 교역의 문제는 인도가 제국을 상대로 큰 무역흑자를 냈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23~79년)는 이렇게 썼다. "인도가 로마에서 5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가져가지 않은 해는 단 한 해도 없었다."
무역적자는 금화·은화의 지속적인 유출을 뜻했고, 이는 로마 내 귀금속 부족을 낳았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로마는 끊임없이 통화 긴축(monetary squeeze)에 직면했던 셈이다.
제국이 대외·대내 전쟁 때문에 빈번히 재정적자를 냈다는 점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로마 황제들은 이 쌍둥이 적자에 여러 방식으로 대응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1세기에 인도산 수입품 제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더 흔한 대응은 금·은 함량을 줄여 제국 주화를 변조하는 것(고대판 화폐 발행)이었다. 당연히 주화의 실질가치는 하락했고 로마는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38년에서 301년 사이 군복 가격은 166배, 밀 가격은 200배 이상 올랐다고 추정된다. 이는 인플레이션이 현대의 발명품이라는 또 다른 통념도 깨뜨린다.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유명한 가격 고정 칙령을 포함해 물가 안정을 위한 여러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인도와의 지속적인 무역적자, 만성 재정적자, 그에 따른 주화 변조 앞에서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인도인들은 수 세기 동안 변조된 주화를 계속 받아들였다. 물론 환율은 꾸준히 떨어졌을 것이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경제에 심각한 왜곡을 낳았다. 병사 급여의 실질가치가 너무 줄어 1년치 급여로 8주치 빵을 겨우 살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제국이 최종적 쇠퇴로 접어드는 와중에 로마의 신뢰도를 갉아먹은 압력 중 하나였다.
[8레알 은화(Pieces of eight)]
로마 쇠퇴 이후 천 년 동안 유럽은 세계 경제에서 비교적 작은 역할만 했다. 그 사이 아랍, 인도, 중국, 동남아 왕국들 간의 교역은 번성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이 이를 바꿨다. 스페인은 초강대국이 되었고, 신대륙 은에 대한 접근이 그 재정력을 뒷받침했다.
1501년부터 1600년 사이 순은 1,700만 kg과 순금 18만 1천 kg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그 부를 네덜란드 등지에서의 값비싼 전쟁에 써버렸다.
그 결과 스페인은 유럽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무역적자를 냈고 이를 은화로 결제했다. 이 통화 유동성 주입은 유럽 나머지 지역에 경제 호황을 일으켰고 르네상스 정신의 확산을 도왔다.
그럼에도 귀금속 공급 증가는 지속적인 인플레이션도 불러왔다. 16세기 동안 스페인 물가는 최소 4배 올랐다. 신대륙 은에 접근할 수 있었음에도 스페인은 점점 전쟁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스페인의 금·은 공급분은 종종 수년 전부터 제노바 은행가들에게 담보로 잡혀 있었다. 결국 스페인은 국가부채를 거듭 디폴트했고(1607년, 1627년, 1649년) 지정학적 쇠퇴에 들어갔다. 독일의 푸거 가문 등 많은 은행가들이 이 디폴트로 파산했다.
정치·경제의 중심은 이제 북쪽의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17, 18, 19세기에 차례로 세계 무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런 이동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은화("8레알 은화" 또는 스페인 달러)는 미국 독립전쟁 때까지 세계 무역의 핵심 통화로 계속 쓰였다. 실제로 스페인이 강대국 지위를 잃고 한참 뒤인 1857년까지도 미국에서 법정통화로 남아 있었다.
[아편 무역]
영국이 세계의 앵커 경제라는 자신의 역할을 확인하는 체제를 마침내 구축한 것은 나폴레옹 패배 이후인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역사가들은 이 체제를 영국·인도·중국 간 "삼각무역"이라 부른다. 이 구조에서 영국은 인도에 공산품을 팔고 원면과 아편을 사들였다. 아편은 중국에 팔아 차와 도자기 등을 받았고, 이를 다시 유럽에서 팔아 인도 수출용 제조업 자금을 댔다.
이런 식으로 영국은 체제를 굴리기 위해 금을 유출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 무역체제가 작동한 것은 동인도회사가 군사적으로 자기 뜻을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영국산 공산품 수입은 인도의 거대한 장인 기반 제조업을 초토화시켰다.
동시에 중국의 아편 무역 차단 시도는 1839~42년과 1856~60년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전쟁, 식민화, 마약 밀매가 국제통화체제 운영의 핵심 재료였다.
19세기 중반 세계는 금과 은에 기반한 복본위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선례를 따라 대부분의 주요국은 1870년대까지 금본위제로 전환했다.
영란은행은 요구 즉시 1파운드 스털링을 (11/122 순도) 금 1온스로 태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 재무부 역시 금 1온스를 4.86달러로 태환하기로 약속했다. 이것이 달러-파운드 환율을 고정시켰다.
이 통화체제는 세계 무역과 경제활동의 대확장기를 떠받쳤다. 그러나 그 성공은 운 좋은 우연 — 캘리포니아, 호주, 남아프리카에서 잇달아 금이 발견되어 세계 금 공급이 경제활동에 대체로 보조를 맞춰 늘어난 것 — 에 기대고 있었다. 이 발견들 다수가 마침 영국 지배하에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그렇다 해도 문제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 인플레이션기와 디플레이션기가 번갈아 있었고, 잇따른 "패닉"이 세계 금융시스템을 흔들었다. 금 공급 과잉이 지속적 인플레이션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체제는 1차 세계대전으로 마침내 무너졌지만, 그 무렵 영국은 이미 오래전에 세계 최강 경제국이 아니었다. 영국은 1890년경 미국에, 1900년대에는 독일에 추월당했다.
전후 승전 연합국은 독일에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다른 자원이 없던 독일 당국은 점점 더 많은 지폐를 찍어냈고 그 과정은 통제 불능으로 치달았다.
1923년 11월 빵 1kg은 4,280억 마르크, 버터 1kg은 5조 6천억 마르크, 신문 한 부는 2천억 마르크, 전차표 한 장은 1,500억 마르크였다. 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경험은 여전히 독일인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한편 영국은 1925년 금본위제로 복귀해 전전(戰前) 세계 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또 19세기 삼각무역과 같은 역할을 할 "제국특혜(Imperial Preference)" 중상주의 체제를 대영제국 내에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변했고 영국의 지위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했다. 대공황이 닥치자 영란은행은 은행권에 유동성을 공급할 것인가, 금 페그를 지킬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1931년 9월 20일, 영란은행은 전자를 택했다.
[지속적 불균형의 경제학]
"대수축(Great Contraction)" 또는 "대침체(Great Recession)"로 다양하게 불리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흔히 부채와 신뢰 상실이 촉발한 세계 통화체제의 위기로 해석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세계 통화체제의 "개혁"을 주장해 왔다. 금본위제 복귀, IMF 특별인출권(SDR)의 역할 확대, 완전히 새로운 세계통화 등 다양한 제안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이 문제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대 인도인들이 변조된 로마 주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듯, 오늘날의 중앙은행과 경제주체들은 미국의 민간·공공 부채, 정치적 다툼, 심지어 국가신용등급 강등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미 달러를 보유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는 각국이 비대칭적 구조의 문제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계 경제체제의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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