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페로
3시간 전
[주제14] 나라는 빚을 줄일 수 있는가?(5편) - 완결
1편에서는 국가 부채의 현황과 장기금리 추세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2편에서는 장기금리에 대해 더 높은 기간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된 이유,
3편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국채 수요 창출과 금리를 관리하기 위한 재무부·연준의 정책과 한계점,
4편에서는 부채 감축 방법과 디레버리징에 따르는 고통을 살펴봤는데요.
이제 마지막 편입니다. 왜 부채 감축은 어려운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낸 사례는 없을까요?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6. 디레버리징의 태생적 한계 — 시계의 불일치
앞서 "국가의 빚은 왜 줄지 않을까?" 편에서,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태생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외부효과와 시간의 불일치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1) 외부효과
부채 감축의 이득은 지금의 자녀 세대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지 모를 미래 세대들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정부가 찍어낸 채권으로 안락한 복지를 누리고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죠.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도 내가 있는 동안만 부채 위기가 터지지 않는다면, 채권을 마음껏 발행해 현금성 복지를 늘림으로써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데, 굳이 미래의 이름 모를 정권을 위해 내가 희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2) 시간의 불일치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볼 내용인데요. 빚은 쉽고 빠르게 낼 수 있지만, 그 낸 빚을 갚는 것은 어렵고 오래 걸립니다. 디레버리징의 시계는 얼마나 길 까요?
• 캐나다: 1990년대 재정개혁의 모범으로 꼽히는 캐나다는 정점인 66.6%에서 28%로 부채비율을 감축하는 데 13년이 걸렸습니다. 캐나다의 모범 사례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벨기에: 유로 가입 조건을 맞추기 위해 GDP의 5~6%에 이르는 기초흑자를 10년 넘게 유지하면서 부채비율을 1993년 138%에서 2007년 84%로 내렸습니다.
• 스웨덴: 1990년대 초 금융위기를 겪은 뒤 흑자 목표제를 법으로 제정해, 80%였던 부채비율을 2008년 38%까지 내렸습니다.
세계 어떤 사례를 살펴보아도, 위기도 채권자의 강제도 없이 국채시장의 경고와 여론만으로 국가가 자발적으로 부채 축소를 이뤄낸 사례는 1995년의 캐나다가 유일합니다.
부채 감축의 시계는 최소 10년 단위입니다.
그에 반해 정치의 시계는 너무나 짧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5년, 국회의원은 4년, 프랑스 총리는 최근 기준으로 1년이 채 안 됩니다. 세 명의 총리가 13개월 사이에 물러났습니다. 어떤 정치인도 자기 임기 안에 열매를 볼 수 없는 정책을 위해 자기 임기 안에 확실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리로 나온 128만 명의 시위는 개혁이 옳은지 그른지와 무관하게, 그 개혁을 밀어붙인 사람의 정치 생명을 끝내 버립니다. 국민적 저항 앞에 위대한 정치 지도자의 부채 감축 의지는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과도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볼 때, 디레버리징은 대개 두 경우에만 일어납니다.
① 아르헨티나의 밀레이처럼, 이미 폭탄이 터져서 고통이 더 커질 여지가 없는 '갈 때까지 간' 상태에서 유권자 스스로가 디레버리징의 고통을 선택하는 경우
② 그리스처럼, 채권자가 대신 선택해 주는 경우
두 경우 모두 자발적인 경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오랜 기간 조금씩'이 아니라 '언젠가 나중에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누린 사람들은 모두 빠지고 난 뒤에, 영문도 모르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한꺼번에 지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이면 백, 모든 국가가 그렇게 방만한 재정 관리로 부채비율을 키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1995년의 캐나다는 국가 재정 관리의 유니콘 같은 사례였습니다.
7. 자발적 부채 감축의 유일한 사례 — 캐나다
<배경>
1993~94 회계연도 캐나다 연방 적자는 420억 캐나다달러, GDP의 5.9%였고 연방 부채는 66%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세수의 3분의 1이 채권 이자로 나갔습니다. 1994년 말 멕시코 페소 위기로 신흥국에서 자금이 빠지자 불똥이 캐나다로 튀었고, 1995년 1월 월스트리트저널은 "Bankrupt Canada?(파산한 캐나다?)"라는 사설에서 캐나다달러를 "북쪽의 페소"라고 불렀습니다. 무디스는 예산 발표 직전 캐나다를 신용 감시 대상에 올렸고, 그해 4월 실제로 AAA를 박탈했습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채권시장과 언론이 위기의 임박을 보여준 것입니다.
1995년 2월 27일, 크레티앙 총리와 폴 마틴 재무장관은 재정개혁 예산안을 내놓습니다. 마틴 재무장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come hell or high water)" 적자를 잡겠다고 선언했고, 이 예산은 훗날 IMF와 OECD가 자발적 재정 건전화의 교과서로 인용하게 됩니다.
<예산안 내용 — 증세가 아니라 삭감, 일괄이 아니라 심사>
삭감과 심사. 두 가지가 개혁안의 뼈대입니다.
첫째, 지출 삭감과 증세의 비율을 약 7:1로 잡았습니다. 세금 1달러를 더 걷을 때 지출 7달러를 깎는 구성으로, 사실상 삭감이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지출(정부 총지출에서 국채 이자를 뺀 나머지를 뜻하는 캐나다 재정 통계 용어)은 2년 만에 명목 기준 약 10% 줄었는데, 평시 선진국에서 명목 지출 자체가 줄어든 것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입니다.
둘째, '프로그램 리뷰'라는 방식입니다. 일률 몇 % 삭감이 아니라, 모든 부처의 모든 사업을 여섯 가지 질문으로 심사해 차등 삭감했습니다.
① 이 사업은 여전히 공익에 부합하는가?
② 애초에 정부가 할 일인가?
③ 정부가 할 일이라면, 연방정부가 할 일인가 주정부가 할 일인가?
④ 민간이나 자원부문에 넘기면 더 잘하지 않는가?
⑤ 계속한다면 더 싸게 할 방법은 없는가?
⑥ 이 모든 걸 감안할 때, 지금 재정 형편에 감당 가능한가?
이 리뷰를 기반으로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폐지·민영화, 통과하면 효율화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교통부 예산은 절반 이상, 산업 보조금은 60%가 날아갔고, 100년 된 곡물 운송 보조금이 폐지됐으며, 연방 공무원 약 4만 5천 명(14%)이 감축됐습니다. 주정부 이전지출은 통합 교부금으로 묶어 대폭 줄였고, 실업보험은 고용보험으로 개편해 급여를 조였습니다. CN철도 민영화 같은 공공부문 자산 매각도 병행됐습니다.
<결과>
적자 GDP 5.9%(1994)는 제도 시행 3년 만에 사라져 1997-98년, 약 30년 만의 첫 균형재정을 달성했고 이후 11년 연속 흑자를 냈습니다. 부채비율은 1995-96년 66.6% 정점에서 2008-09년 28.2%까지 13년간 내려왔습니다.
2007-08 회계연도의 연방부채는 1996-97년 정점 대비 1,052억 캐나다달러 감소해 18.7%가 줄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분모인 GDP를 키워 부채비율을 내렸을 뿐이었는데, 캐나다는 11년간의 흑자로 연방부채 잔액을 실제로 갚아 없앤 것입니다. 선진국 사례 중 부채의 총량이 줄어든 유일한 경우입니다.
신용등급 AAA는 2002년 되찾았습니다. 물론 운도 따라줬습니다. 1990년대 후반 금리 안정화로 이자 부담이 줄었고, 미국 호황과 약한 캐나다달러가 수출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GDP 성장으로 부채비율의 분모도 개선되었습니다. 4편에서 언급했던 "부채 감축은 튼튼할 때 해야 성공한다"는 조건이 캐나다 사례에서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개혁을 진행한 크레티앙이 1997년과 2000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긴축한 정치인은 죽는다"는 명제의 몇 안 되는 반례입니다. 성공 요인으로는 '부채의 벽' 담론이 몇 년에 걸쳐 여론에 스며들어 국민 다수가 필요성을 받아들인 상태였다는 점, 그리고 삭감을 이념이 아니라 심사(프로그램 리뷰)로 정당화해 공정성 시비를 줄인 점이 꼽힙니다.
8. 결론 — 폭탄 돌리기는 지금 멈춰야 한다
9월 2일 새벽, 미국 채권금리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미국채 10년물 금리가 4.8%까지 오르며 2023년 11월 이후 최고치를 갈아치웠습니다. 2023년 11월은 미 연준이 코로나 사태 이후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올리던 시기였습니다. 시장은 지금을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 재개에 따른 유가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8월 잭슨홀 연설에서 케빈 워시 미 연준의장이 금리 인상 카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음을 시사하며 채권 매도세가 지속된 데 따른 것이라는 게 시장의 설명인데요.
앞의 이유들은, 인플레이션이 아직 본격화되지도 않았는데 10년물 금리가 2023년 11월보다 높게 형성된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국 재정적자 확대와 국채 발행의 증가로 인한 채권시장의 신뢰 하락과 요구수익률 상승이 그 원인입니다. 채권금리의 상승과 부채 위기에 대한 각종 경고음들. 이제 더 이상의 확장 재정은 멈추고 건전한 재정으로 복귀할 때라는 신호가 곳곳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 "나라는 빚을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이제 내려보고자 합니다.
부채의 감축은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존에 국가들이 애용했던, 인플레이션으로 녹이고 GDP를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그동안 쌓여온 부채 잔액을 녹이는 방식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 누구도 부채 잔액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끝에, 누적된 부채에서 발생한 이자가 부채비율 자체를 흔들고 있으며, 채권시장의 신뢰 상실에 따라 높아지는 요구수익률이 만들어내는 금리 상승은 GDP 성장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긴축과 세금 인상을 통해 더 이상의 방만한 국가 재정 운용을 중단해야 합니다. 국민들 역시 현금성 복지 잔치 뒤에는 거대한 적자국채의 발행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음을 이해하고, 그러한 포퓰리즘으로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을 심판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긴축을 통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겠다고 하는 정치인이 진정 나라를 위하는 정치인임을 깨닫고, 그들에게 끊임없는 지지를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부채의 폭탄 돌리기 끝에서 모든 것을 독박 쓰는 불행한 국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을 서서히 나눠서 부담하며 밝은 미래를 만들 것인지, 계속해서 폭탄을 돌리며 다 같이 그 낙진에 잠겨버릴지는 지금의 우리가 그 결정권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선택이 중첩된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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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

화사한여자
1시간 전
캐나다 달랑 한군데 있다니... 어쨋든 저는 부채를 줄이겠단 정치인이 있으면 한표 행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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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영
1시간 전
며칠째 읽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좋은 공부가 되었고 객관적으로 써주시니까 공부도 되고 좋습니다. 이코에서만 이런 분위기를 느낄수 있어서 정말 좋구요. 만수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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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페로
1시간 전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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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박씨
1시간 전
원래는 우리 나라 정서가 캐나다보다 더 맞을 것 같은데 그 사이 많이 오염이 되어 어떨 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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