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페로
5일 전
<미국 국채는 안전자산인가? 듀레이션과 금리(1편)>
1.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만 골라 담은 은행의 파산 : SVB 사태
여기 한 은행이 있습니다. 이 은행은 위험한 대출에 손을 대며 고수익을 추구하거나 복잡한 파생상품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 은행이 고객이 맡긴 돈으로 사들인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바로 그 자산 — 미국 국채와 미국 정부기관이 보증하는 채권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보다 모범적인 은행이 없습니다. 떼일 염려가 없는 안전 자산만 골라 담았으니까요.
그런데 이 은행은 2023년 3월, 단 이틀 만에 무너졌습니다. 미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규모의 은행 파산이었습니다. 이름은 Silicon Valley Bank, 줄여서 SVB입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만 샀는데, 어떻게 은행이 망하지?”
그 답에는 모두가 아무 의심 없이 믿어온 “국채=안전자산”이라는 진리 속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금리갭(duration gap)과 듀레이션(duration)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전 세계가 그동안 믿어왔던 미국국채라는 안전자산이 금리상승이라는 악재 악재 속에 전 세계의 수많은 금융기관들을 배신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2. 짚고 넘어가기 — 채권 가격과 금리의 관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사전 지식 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금리가 오르면 이미 발행된 채권의 가격은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100만 원을 주고 연 2% 이자를 주는 10년짜리 국채를 하나 샀다고 해봅시다. 1년에 2만 원씩 이자를 받는 채권입니다. 다음 날, 시장 금리가 확 뛰어서 이제 막 발행되는 똑같은 10년짜리 국채가 연 5% 이자를 준다고 해봅시다. 새 국채는 1년에 5만 원을 줍니다.
자, 이제 제가 가진 2% 국채를 팔려고 내놨습니다. 누가 100만 원을 주고 사줄까요? 아무도 안 삽니다. 같은 100만 원이면 옆에서 5만 원 주는 새 국채를 사면 되는데, 뭐 하러 2만 원짜리를 사겠습니까?
그럼 제가 가진 2% 국채가 팔리려면? 가격을 깎아야 합니다. 제 채권을 사는 사람이, 깎인 가격 덕분에 결과적으로 새 채권과 비슷한 5% 수익률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값을 내려야 팔립니다.
"금리가 올랐다 = 이미 발행된 낮은 금리 채권의 가격이 떨어진다." 이것이 채권과 금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입니다.
3. 듀레이션 — 만기가 길수록 금리 충격이 몇 배로 증폭된다
앞에까지는 바로 금리와 채권 가격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SVB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추가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리가 오르고 내릴 때 채권 가격이 “얼마나” 움직이는지, 그 크기를 결정하는 열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열쇠가 바로 듀레이션입니다.
듀레이션(duration)은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금리가 1% 포인트 변할 때 채권 가격이 몇 % 움직이는가”를 나타내는 민감도 지표입니다. 원래 정의는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데 걸리는 가중평균 기간’이지만, 실전에서는 이 민감도 개념으로 쓰는 게 훨씬 직관적입니다.
듀레이션의 핵심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기가 길수록 듀레이션이 크고, 금리 변동에 듀레이션의 배수만큼 채권의 가격이 출렁인다."
왜 그럴까요?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죠. 만기가 1년짜리 채권이라면, 금리가 아무리 올라도 1년만 참으면 원금을 돌려받고 다시 높은 금리로 갈아탈 수 있습니다. 손해 볼 시간이 짧으니 가격도 조금밖에 안 빠집니다.
그런데 만기가 10년, 20년짜리 채권이라면? 그 긴 세월 동안 남들보다 낮은 이자를 꼬박꼬박 받으며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 ‘손해 보는 기간’이 길수록, 지금 당장 그 채권을 팔 때 깎이는 폭도 커집니다.
여기에 추가로 채권 이자는 보통 복리로 지급된다는 사실을 고려해 봅시다. 복리의 무서운 점은 그래프가 지수함수로 상승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30년 만기의 채권의 30년간 현금흐름을 상승한 현재 금리를 기준으로 현가(오른 금리 기준으로 복리로 나눔)하게 되면, 먼 만기에 있는 현금흐름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만기가 길수록 채권 가격의 하락은 더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숫자로 감을 잡아봅시다. 근사치를 기준으로 산출해 보겠습니다.
- 듀레이션이 2인 채권(짧은 만기): 금리가 1% 포인트 오르면 가격이 약 2% 하락
- 듀레이션이 10인 채권(긴 만기): 금리가 1% 포인트 오르면 가격이 약 10% 하락
같은 1% 포인트 금리 상승인데, 한쪽은 2% 빠지고 다른 쪽은 10%가 증발합니다. 이게 듀레이션의 위력입니다. 만기를 늘리는 순간, 금리 충격은 듀레이션만큼 배로 증폭되어 되돌아옵니다.
간단하게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첨부 그림 참조) 금리와 듀레이션의 관계는 시소와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합니다. 왼쪽에 금리라는 큰 형님이 앉아 계시고, 오른편엔 듀레이션이 짧은 채권 순으로 앞에 앉아 있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단기채권은 오른 만큼 내리지만, 중기채와 장기채는 듀레이션의 배수만큼 아래로 내려갑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듀레이션 1년짜리 채권이 현물 주식이라고 한다면, 듀레이션 10년짜리 채권은 금리 변동에 10배 레버리지를 건 상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TMF와 같은 상품은 장기채의 가격 상승에 3배 레버리지 배팅을 하는 상품인데, 20년물을 기준으로 하니 금리가 1% 오를 때 채권가격은 이론상 60%가 빠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SVB가 실제로 들고 있던 만기보유 채권의 듀레이션은 약 6.2년이었고, 그마저도 상당수가 잔존만기 10년이 넘는 장기 주택저당증권이었습니다. 위 예시의 ‘듀레이션 10짜리’만큼 극단적이진 않아도, 은행이 감당하기엔 충분히 위험한 수준이었습니다.
이제 SVB가 “안전하지만 또 한편으로 위험한 자산을 손대었다”라는 설명이 이해가 가시나요? SVB는 하필 만기가 아주 긴 장기 채권을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것도 금리가 역사상 가장 낮았던, 그래서 채권 가격이 가장 비쌌던 시점에 말이죠. 안전한 자산을 샀지만, 금리 상승에 더욱 큰 충격을 받는 장기채를 잔뜩 담은 겁니다.
2편에서는 SVB 사태를 시계열에서 살펴보고, 우리가 "국채는 안전자산이다"라는 명제에서 반드시 추가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짚고 넘어가 보려고 합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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