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온화
2026.05.02.
지지부진한 사람의 독서법
나는 느리다. 책 한 권을 붙잡고 반 년을 보내기도 한다. 한 페이지, 한 줄, 때로는 단어 하나의 음과 뜻과 어원을 찾아보며 완전히 이해하려 한다. 주변에서는 이것을 지지부진하다고 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실제로 지지부진하다. 다만 지지부진함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완독이라는 말이 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는 뜻이다. 이 단어에는 묘한 승리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책이 원래 저항하는 존재였고, 독자가 그것을 끝내 제압했다는 뉘앙스다. 나는 한때 그 승리감을 즐겼다. 완독한 책의 수가 곧 나의 지적 전력이라 믿었다. 깃발을 꽂고, 다음 영토로 이동했다. 깃발만 잔뜩 꽂힌 지도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빠른 사람은 많은 곳에 깃발을 꽂는다. 지지부진한 사람은 한 곳을 오래 밟는다. 그리고 밟은 땅만이 진짜 영토가 된다.
멈추는 것은 나태가 아니라 신호다. 융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무의식은 억압되거나 무시될 때 비로소 문제가 되고, 의식과 마주칠 기회를 얻을 때 비로소 자원이 된다고 했다. 텍스트 앞에서 멈추는 순간, 무의식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의식은 문장을 읽고, 무의식은 문장 사이의 여백을 읽는다. 지지부진한 사람은 그 여백에 오래 머문다. 빠른 사람이 이미 다음 장을 넘기는 동안.
나의 독서는 문학에서만 시작하지 않는다. 철학서일 수도 있고, 비문학일 수도 있고, 심지어 문제집일 수도 있다. 독서의 자격은 장르가 부여하지 않는다. 멈추는 행위가 부여한다. 읽다가 멈추고, 생각하고, 내 일상과 연결한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독서다. 문학계의 승인을 기다리며 독서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지점을 곱씹다 보면, 일상이 텍스트 안으로 침입한다. 감정이 입혀지는 것이다. 지식이 체온을 얻는 순간이다. 체온 없는 지식은 박제와 같다. 박제된 호랑이가 아무리 늠름해도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일상과 접촉하지 못한 문장은 그저 지면 위에 머문다. 지지부진한 사람은 느리기 때문에 접촉할 시간이 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융이 말한 개성화, 즉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은 거창한 수련의 결과물이 아니다. 멈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멈추고 곱씹는 태도가 쌓이면 삶 안에서 조용한 변화가 일어난다. 충동적인 반응이 줄어든다. 이유도 모른 채 끌리거나 밀어내던 것들의 윤곽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다. 이것을 성숙이라 부를 수도 있고, 그냥 덜 피곤해지는 것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지지부진함의 배당금이다.
물론 도구적 삶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돈을 벌고, 밥을 먹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없으면 멈춰서 곱씹을 여유 자체가 없다. 도구적 삶은 현실을 살게 해주고, 멈추는 태도는 그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둘은 대립이 아니다. 구조와 내용의 관계다. 구조 없는 내용은 공중에 뜨고, 내용 없는 구조는 텅 빈 골조로 남는다.
단어 하나를 붙잡고 그 뜻을 곱씹는 행위는, 그래서 단순한 공부가 아니다. 완독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대부분 지금을 통과하고 있다. 멈추는 순간, 비로소 지금에 머문다. 단어를 곱씹고 이해하려는 그 순간 자체가, 이미 충분히 살고 있다는 증거다. 지지부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삶은 완독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끝까지 다 읽고 덮은 뒤 후기를 남기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진행 중인 텍스트 안에 살고 있다. 깃발을 꽂는다고 영토가 되지는 않는다. 영토는 그 땅을 천천히 걸어본 사람의 것이다.
느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느린지가 문제였다. 중요한 곳에서 지지부진한 사람은, 사실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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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

소녀시대
2026.05.03.
하루에 한권 일주안에 두세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보면 내용을 다 알고 있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속독이지 완독은 아닌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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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온화
2026.05.03.
잘 모르거나 안 다고 해도 자신의 경험과 결합한 독서는 아닐 확률이 높겠죠. 조만간 기억에서 사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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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2026.05.03.
문정을 멈추고 곱씹는거 훈련이 필요한거 같아요. 스크롤에 익숙해져서 그 과정을 자꾸 생략하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도 그때문인거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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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온화
2026.05.03.
네. 디지털 환경에선 그게 잘 안 되죠.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이 나면 최대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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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영
2026.05.03.
요즘 sns에서 이런 글 읽기가 쉽지 않은데 정성들여 쓰신 글 잘 봤습니다. 두번 읽었어요. ㅎㅎ독서를 하기는 하는데 완독했는가에 대한 자신은 없네요. 이코에서 자주 뵐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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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온화
2026.05.03.
저도 읽다가 멈춰서 무의식에서 올라왔던 것들을 질문하고 찾아보고 제 삶에 비춰보며 정리했습니다. 이 글 또한 저의 2차적 독서입니다. 종종 인사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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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버는엄마
2026.05.03.
글 잘 보고 갑니다. 공들여 쓰신 티가 나서 뭐라도 남기고 가야겠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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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가기 전날
2026.05.03.
글을 읽어야 되는데...글자를 읽으면 안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으려면 마치 씨름하는 자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읽고 또 읽었지만 여운이 크고 강하게 남는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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