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코노미캉
5시간 전
<한전의 25조 선납 제안, 생각해볼 것>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에 20조원, SK하이닉스에 5조원, 총 25조원 규모의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습니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납부한 전기요금(삼성전자 4조1000억원, SK하이닉스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산정한 금액입니다. 선납금은 매달 전기요금에서 차감되고, 남은 금액에는 이자가 붙는 구조입니다.
표면적인 명분은 명확합니다. 한전의 총부채는 올 상반기 기준 210조7000억원, 하루 이자만 115억원이 나가는 상황에서, 용인,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송, 변전망 투자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채(한전채) 잔액은 6월 말 기준 71조5000억원, 상반기 이자비용만 2조790억원에 달합니다. 여기에 반도체 클러스터의 최대 수요자인 두 회사가 자금을 대는 구조이니, 언뜻 보면 합리적인 그림입니다.
여기서 짚어볼 지점이 있습니다. 한전이 돈이 필요하면 원래 하던 대로 한전채를 더 찍으면 됩니다. 그런데 굳이 '선납'이라는 방식을 새로 설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전채 발행에는 규제가 걸려있습니다.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일정 배수까지만 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걸 '사채발행배수'라고 부릅니다. 원래 한도는 2배지만, 정부가 특례로 5배까지 늘려준 상태입니다. 문제는 이 특례가 내년 말 종료되고, 2028년부터는 다시 2배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한전 입장에서는 그 전에 사채 의존도를 확 낮춰놓아야 하는 시간표가 정해져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지난 2일 국회 토론회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 전력시장과장은 "선납제도가 한전의 사채발행배수를 2027년 말까지 2배 이내로 낮추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목적이 재무비율 관리라는 걸 정부 스스로 숨기지 않은 셈입니다.
한전 측이 국회 토론회에서 공개한 금리 조건은 국고채 금리에 15bp를 더하는 수준입니다. 한전이 자체 신용으로 한전채를 발행할 때보다 낮은 금리로 조달하겠다는 뜻입니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고채와 공기업인 한전이 발행하는 한전채는 신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시장에서 요구하는 금리도 다른데, 이번 선납 조건은 그 스프레드 차이를 거의 국고채 수준으로 눌러놓은 셈입니다. 그 차이만큼의 기회비용은 결국 선납에 참여하는 두 회사가 떠안는 구조입니다.
게다가 이자 지급 방식도 현금이 아닙니다. 6개월 단위로 향후 전기요금을 깎아주는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전 입장에서는 실제 현금이 한 푼도 나가지 않는 차입인 셈입니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반기보고서 기준 현금, 현금성자산 및 단기금융상품이 총 189조9530억원에 달합니다. SK하이닉스는 2분기 말 현금성자산이 88조원, 차입금 18.6조원을 뺀 순현금은 69.4조원입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로 두 회사 모두 올해 들어 현금이 크게 불어난 상황입니다.
이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20조원 선납 요청은 보유 현금성자산의 약 10.5%, SK하이닉스의 5조원은 약 5.7%(순현금 기준 약 7.2%) 수준입니다. 즉 두 회사 모두 여력 안에서 감당 가능한 규모의 요청은 맞습니다.
다만 비율이 낮다고 해서 부담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현금은 원래 HBM, 파운드리 설비투자, M&A, 배당 재원 등으로 쓰일 수 있는 돈인데, 5년치 규모가 전기료라는 특정 용도로 묶이는 기회비용 자체는 별개로 남습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미국 ADR 상장으로 265억달러(약 38조8000억원)를 새로 조달했는데, 이 자금 중 일부가 원화 환전 요청과 이번 전기료 선납 논의에 함께 거론되는 모양새입니다. 어렵게 조달한 실탄 일부가 정책 협조 논의에도 함께 오르내리는 그림인 셈입니다.
비판할 지점이 분명한 동시에, 이 방식이 나온 배경도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재정을 직접 투입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국가부채를 늘리지 않는 방향 자체는 합리적입니다.
두 회사도 이 전력망 투자의 최대 수혜자라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합니다.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이 지연되면 결국 자신들의 팹 가동 스케줄에 타격이 오기 때문에, 완전히 일방적인 부담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선납금은 손실이 아니라 자산이 선급비용 형태로 바뀌는 것뿐이라, 회계적으로 두 회사가 돈을 잃는 구조도 아닙니다. 앞서 짚었듯 요청 규모 자체도 두 회사의 현금 여력 대비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 “부담이 감당 안 될 만큼 크다”는 프레이밍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근본 원인인 한전의 재무구조 자체를 손보지 않은 채 우회로를 계속 찾고 있다는 점은 남습니다. 이번 설계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 구조적 문제를 풀지 않으면 비슷한 문제가 다른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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