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훈
2026.02.09.
디지털 금이라는 믿음이 흔들릴 때
나는 오래전부터 비트코인을 하나의 실험이라고 생각해 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금을 벤치마킹한 디지털 실험.
금은 희소하다. 채굴에는 비용이 들고, 쉽게 복제할 수 없다. 비트코인 역시 그렇다. 작업증명이라는 비싼 에너지 장벽 위에 세워졌고, 발행량은 2,100만 개로 고정돼 있다. 이 구조만 놓고 보면, 비트코인은 분명 “디지털 금”이라는 별명이 과하지 않다.
반면 이더리움을 비롯한 수많은 코인들은 늘 내겐 다른 광물들 같았다.
은도 있고, 구리도 있고, 니켈도 있다. 그런데 현실의 광물은 종류도 양도 유한하다. 하지만 가상자산은 다르다. 오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새로운 코인을 만들 수 있고, 내일이면 또 수천 개가 생긴다. 희소성이 설계 가능한 세계에서, 과연 ‘가치’라는 말이 성립할까. 나는 늘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비트코인만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최초라는 상징성,
막대한 해시파워가 지켜주는 네트워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세계 곳곳의 검은 돈이 뿌리내린 현실.
불법이든 탈법이든, 일단 자본이 깊게 스며들면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비트코인이 싫든 좋든 살아남을 거라고 봤다.
그런데 최근, 생각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블록체인은 완벽했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빗썸 사태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숫자의 규모가 아니었다.
수십 조 원어치의 ‘유령 비트코인’이 잠시 계정 위에 떠올랐다는 사실도 물론 충격적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코인들은 블록체인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거래소 내부 DB에서만 생성된, 말 그대로 가짜 잔고였다.
우리는 흔히 암호화폐 거래를 블록체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부분의 매매는 중앙화 거래소 안에서, 단순한 숫자 변경으로 처리된다. 실제 블록체인은 입출금할 때만 관여한다.
즉 우리가 믿어온 “탈중앙 보안”은, 정작 일상의 거래에서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해킹이 아니었다.
암호학이 뚫린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내부 입력 오류였다.
그리고 그 실수 하나로, 존재하지도 않는 비트코인이 대량 생성되었다.
이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시스템 위에,
엑셀 같은 인간의 관리 구조가 얹혀 있는 모습.
디지털 금은 유리 진열장 안에 있다.
비트코인의 본질은 여전히 강하다.
분산 합의, 변경 불가능성, 작업증명.
문제는 그것이 투자자가 실제로 접하는 비트코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개인 지갑이 아니라 거래소 계정을 통해 비트코인을 본다.
우리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서버를 상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의존하는 것은 코드가 아니라 운영자다.
디지털 금은 지금, 중앙화 거래소라는 유리 진열장 안에 놓여 있다.
겉보기엔 단단해 보이지만, 진열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실수하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번 빗썸 사태는 이 사실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블록체인은 멀쩡했지만, 시장은 흔들렸다.
프로토콜은 안전했지만, 가격은 급락했다.
보안의 무결성이 기술적으로 보장되어 있어도,
시스템 전체의 무결성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보여준 사건이다.
이제 비트코인을 던져야 할까
그래서 나는 요즘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비트코인을 던져야 하는 걸까.
답은 아직 유보다.
비트코인은 여전히 최초이고,
여전히 가장 크며,
여전히 가장 깊이 뿌리내렸다.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우리가 믿어온 ‘디지털 금’이라는 서사는
현실의 중앙화 구조 앞에서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비트코인은 탈중앙 자산이지만,
비트코인 시장은 철저히 중앙화되어 있다.
이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비트코인은 기술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화 금융 위에 얹힌 고급 파생상품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비트코인을 흥미로운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그 실험이 얼마나 인간적인 취약성 위에 서 있는지도 함께 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은
“얼마나 오를까”보다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볼 시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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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

고대현
2026.02.09.
믿음이 깨지면 서서히도 아니고 비트도 테라루나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거 같은데요. 이번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인데 사람들이 크게 다루지 않는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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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호
2026.02.0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성들여쓰신거 같아서 두번 읽었습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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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2026.02.09.
저 비트코인도 조금 하는데 이번에 손해를 크게 봤어요. 금액은 작지만 속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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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바위
2026.02.09.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철학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저도 곱씹어가며 두 번 읽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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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선
2026.02.09.
설명을 잘해주셔서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프로필 사진과 소개글은 채우시는게 소통에 유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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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현
2026.02.09.
새로오신 분 같은데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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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여자
2026.02.09.
신규회원님이신가봐요.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하는 내용이 많아서 잘 읽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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