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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7.
신뢰의 이동 — 금에서 코드로, 300년 금융 질서의 전환점에서(ft.이더리움없는 미래는 없다)
1.서론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은 언제나 '신뢰를 발행한 자'였다. 포르투갈은 해상무역로를, 스페인은 금과 은을, 영국은 중앙은행과 국채를, 미국은 달러와 신용을 무기로 각각 한 세기씩 패권을 유지했다. 기축통화의 평균 수명은 약 100년. 달러 패권은 이미 그 주기를 넘어섰다.
그런데 지금, 세 번째 신뢰 구조가 등장하고 있다. 실물(금)도, 제도(국채·달러)도 아닌 코드(알고리즘·합의)다. BIS는 2024년 연차보고서에서 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From commodity money to credit money to tokenised money." 금에서 신용으로, 신용에서 토큰으로. 300년에 걸친 금융 신뢰의 구조적 전환이다.
이 전환의 한복판에 두 개의 블록체인이 있다.
이더리움과 XRP 레저(XRPL)다. 둘은 같은 블록체인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풀려는 문제가 다르고, 설계 철학이 다르며, 지향하는 세계가 다르다. 이더리움은 제도 밖에서 새 세계를 만들려 했고, XRPL은 제도 안으로 스며들어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비교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분석이 아니다. 21세기 금융 질서가 어떤 신뢰 구조 위에 세워질 것인지를 읽는 작업이다.
2.본론 1 — 이더리움: 고통을 통과한 자기 진화
이더리움의 핵심 질문은 비탈릭 부테린이 직접 던졌다. "탈중앙성은 왜 반드시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가. 보안과 지속 가능성은 양립할 수 없는가."
이더리움은 처음 작업증명(PoW)으로 출발했다. 비트코인과 같은 방식이었다. 채굴자들은 전기와 장비를 소모하며 블록을 생성했고, 그 물리적 비용이 보안의 담보였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치명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다. 에너지는 보안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탈중앙성을 잠식한다. 채굴 경쟁은 산업화되고, 산업화는 규모의 경제를 낳으며, 규모의 경제는 권력의 집중을 만들어낸다. 거대 채굴 기업이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순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분산 시스템"이라는 이상은 무너진다.
비탈릭의 답은 지분증명(PoS)이었다. 2016년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 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지분증명에서 보안은 에너지를 태우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손실 위험을 감수하고 경제적 가치를 담보로 거는 데서 온다."
외부의 물리적 자원을 소모하는 대신, 시스템 내부의 자산을 볼모로 잡는 방식이다. 배신하면 내 돈을 잃는다. 그것이 보안의 담보가 된다.
그러나 이 전환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7년의 시간이 걸렸다. 2021년 EIP-1559 도입 과정에서 채굴자들은 51% 공격 시위를 예고하며 반발했다. 비탈릭은 비상 계획을 발표하며 맞섰다.
EIP-1559는 수수료 메커니즘을 넘어선 근본적 전환이었다. 기본 수수료를 소각함으로써 네트워크 사용량과 통화 희소성을 직접 연결했다.
네트워크가 많이 쓰일수록 ETH 공급이 줄어들고, 희소성이 높아지는 구조. 이더리움은 인프라이면서 동시에 경제 시스템이 되었다.
2022년 9월, 더 머지가 완성되었다. 작업증명 체인과 지분증명 체인(비콘 체인)이 하나로 합쳐졌다. 하루 평균 13,000 ETH가 발행되던 구조에서 1,600 ETH로 급감했다. 약 85% 감소. 에너지 소비는 99.95% 줄었다.
달리는 기차의 엔진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내부 갈등, 채굴자 반발, 철학 논쟁을 통과하며 이더리움은 스스로를 바꿨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이더리움의 본질이 있다. 기술적 플랫폼이면서 화폐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오스는 무료 수수료와 빠른 속도처럼 눈에 보이는 사용성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토큰 자체의 가치 저장 모델 구축에 실패하자 생태계가 붕괴했다. 솔라나 역시 FTX 파산 이후 토큰 가격이 흔들리자 검증자들이 이탈했다. 이더리움이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네트워크의 보안, 개발자의 헌신, 사용자의 참여는 모두 토큰 경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인프라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인프라를 지탱하는 자산이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3.본론 2 — XRPL: 처음부터 다른 출발점
XRPL은 이더리움과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다. "기존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더 빠르고 싸게 연결할 것인가."
2011년, 창업자 제드 맥칼렙이 데이비드 슈워츠를 고용하면서 던진 질문이 있었다.
"PoW를 대체할 분산 합의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는가." XRPL은 처음부터 PoW를 사용하지 않은 최초의 블록체인으로 설계되었다. 이더리움이 7년 후에야 도달한 곳에서 XRPL은 출발했다.
XRPL의 합의 메커니즘은 Federated Byzantine Agreement(FBA)다. 채굴도, 스테이킹도, 슬래싱 패널티도 없다. 각 참여자가 신뢰할 수 있는 검증자 집합(UNL)을 선택하고, 그 검증자들이 서로 담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에 기반한다. 보안의 담보가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평판과 신뢰 관계다. 거래 처리는 3~5초, 수수료는 거의 0에 가깝다.
그러나 이 설계에는 이더리움이 선택하지 않은 트레이드오프가 있다. 슈워츠 본인이 말했듯, "신뢰가 조금 있으면 멀리 갈 수 있다." 하지만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XRPL의 보안은 검증자 커뮤니티의 사회적 신뢰에 기반하며, 이더리움처럼 경제적 손실이라는 수학적 억지력이 없다. Ripple Labs가 초기 유통량과 검증 노드에 영향을 미친다는 탈중앙성 논란이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이유다.
그럼에도 XRPL이 선택한 방향은 명확하다. 제도권 금융과의 통합이다. 투자자 명단이 이를 말해준다. 피터 틸, 마크 앤드리슨 — PayPal 마피아로 불리던 실리콘밸리 권력 네트워크가 초기부터 참여했다. ODL(온디맨드 유동성)은 국제 송금에서 은행들이 유지해야 했던 노스트로 계좌를 대체하고 있다. 부탄, 몬테네그로, 팔라우의 CBDC 공식 파트너로 참여했다. 2024년 출시된 RLUSD는 XRP 레저 위에서 작동하는 달러 담보 스테이블코인으로, 규제형 디지털 달러의 실험이다.
XRPL의 청사진은 세 층위로 구성된다. XRP는 유동성 브릿지, RLUSD는 규제형 디지털 달러, 금은 준비금의 신뢰 기반. 이것이 "디지털 금본위제 2.0"의 구조다. 금이 신뢰의 근본, XRP가 흐름의 중재자, RLUSD가 단위의 기준이 되는 체제.
4.본론 3 — 신뢰 구조의 충돌과 바젤 III의 현실
두 시스템을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적 차이보다 신뢰 구조의 차이다.
이더리움은 "코드 기반 신뢰"를 구현했다.
스마트컨트랙트는 "코드는 법보다 강력하다"는 철학의 산물이다. 어떤 제도적 기관도 필요 없이, 알고리즘이 약속을 집행한다. 비탈릭이 말한 "신뢰의 민주화"다.
XRPL은 "코드와 제도 사이의 브릿지"를 선택했다.
완전한 탈중앙화도, 완전한 중앙화도 아닌 "제도권형 탈중앙"이다. 어떤 국가나 은행이 독점하지 않는 공유형 결제 인프라이지만, Ripple Labs의 영향이 존재한다. 이것을 단점으로 볼 것인가, 설계 선택으로 볼 것인가. 이오스의 실패가 보여주듯, 탈중앙성과 실용성의 균형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현실이 있다. BIS 바젤 III 기준이다. 2024년 12월 발표된 「Prudential treatment of cryptoasset exposures」는 명확하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XRP는 모두 Group 2b 자산이다. 위험가중치 최대 1,250%, Tier-1 포함 불가, 은행 Tier-1 자본의 2% 한도 초과 금지. RLUSD 같은 규제형 스테이블코인이 Group 1b로 편입 가능한 것이지, XRP 토큰 자체가 아니다.
여기서 분리해야 할 두 가지 층위가 있다. 네트워크의 가치와 토큰의 가치다. XRPL이 글로벌 결제 인프라가 된다는 것과, XRP 토큰 보유자가 그 가치를 포착한다는 것은 별개의 주장이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꿨지만 TCP/IP 프로토콜에 투자한 사람은 없었다. 기술이 채택된다는 사실이 특정 자산의 가격 상승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 구분을 흐리는 서사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동시에, 반대 방향의 단순화도 경계해야 한다. 이더리움의 기술적 완성도가 곧 생태계의 영속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더 머지 이후에도 Lido 같은 스테이킹 풀의 점유율 집중이라는 새로운 탈중앙성 위협이 등장했다. 기술적 진보와 권력 집중의 긴장은 끝나지 않았다.
5.결론 —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300년 만의 신뢰 구조 교체다. 금에서 국채로, 국채에서 코드로. 이 전환이 완성될 것인지, 어떤 형태로 완성될 것인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세 가지 시나리오가 동시에 가능하다.
비트코인은 기술적 신뢰의 자산으로, CBDC는 국가 신뢰의 통화로, 스테이블코인은 시장 신뢰의 결제 수단으로 각각 공존하는 세계.
혹은 규제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를 장악하고 XRP 레저 같은 네트워크가 인프라 계층으로 흡수되는 세계.
혹은 토큰화된 국채와 CBDC와 블록체인이 상호 연결되어 기술 인프라 자체가 금융 표준이 되는 세계.
이더리움과 XRPL은 이 세 시나리오 모두에서 다른 역할로 등장한다. 이더리움은 코드 기반 신뢰의 플랫폼으로, XRPL은 제도권 결제 인프라로. 둘은 경쟁자라기보다 서로 다른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다.
비탈릭 부테린은 "보안은 에너지를 태우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를 담보로 거는 데서 온다"고 했다. 데이비드 슈워츠는 "신뢰가 조금 있으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했다. 전자는 수학적 억지력을 택했고, 후자는 사회적 신뢰를 택했다. 두 철학 모두 "신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할 질문은 여전히 이것이다.
미래의 화폐 질서는 어디에서 믿음을 만들 것인가. 금도, 국채도, 코드도 — 결국 신뢰는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다. 기술이 바뀌어도, 그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신뢰를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이더리움과 XRPL은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답의 심판관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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