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觀海
2시간 전
영국 의회가 있는 웨스트민스터 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는 중앙 로비(Central Lobby)입니다.
팔각형의 높은 천장 아래 화려한 모자이크가 펼쳐져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성 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 웨일스의 성 데이비드,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이 사방을 장식합니다.
왕과 여왕들의 조각상도 있고, 한쪽에는 작은 우체국도 있습니다. 양쪽으로 상원과 하원 본회의장이 이어집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의원들이 방송 인터뷰를 하고, 지역구 주민들이 의원을 만나기 위해 기다립니다. ’로비(Lobby)’가 정치적 설득을 의미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의회 공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중앙 로비에서 하원 본회의장으로 향하면 의원 로비(Members’ Lobby)가 나옵니다.
그곳에는 처칠, 대처, 로이드 조지, 애틀리 등 영국 현대사를 이끈 총리들의 동상이 있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 복지국가 건설, 시장경제 개혁을 이끈 네 명의 강력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동상들을 볼 때마다, 중앙 로비에 들어서기 전에 지나왔던 세인트 스티븐스 홀(St Stephen’s Hall)을 떠올립니다.
1834년 화재 이전 하원 본회의장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영국 최초의 총리로 평가받는 로버트 월폴, 윌리엄 피트 부자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동상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이곳은 영국 의회정치의 역사가 만들어졌던 장소입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국왕의 권한이 제한되고 의회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당시 정치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국왕과 의회, 귀족과 상공업자, 서로 다른 지역과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당시 의회가 모든 국민을 대표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관계를 의회 안에서 논의하고 조정하는 정치체제가 발전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치문화가 영국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는 운하 하나를 건설하려 해도 의회가 개별법(Private Act)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규모가 놀랍습니다.
1800년부터 1884년까지 영국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의 약 65.9%는 특정 개인이나 지역, 사업 등을 위한 개별·지역·개인법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는 사람과 기존의 재산권을 지키려는 사람이 의회에서 충돌했습니다.
의회는 양측의 의견을 듣고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자 일반법을 만들어 제도를 바꾸어 나갔습니다.
영국 의회에 전달되는 국민의 목소리도 급증했습니다.
1785년 하원에 접수된 공공청원은 298건이었습니다. 1843년에는 한 회기에 무려 33,898건이 접수됐습니다.
약 114배 증가한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술뿐 아니라 국가 운영방식도 바꾸어 나갔습니다.
대한민국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정부 주도로 산업화를 이루었고,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의 권한과 역할이 크게 확대됐습니다.
영국의 1688년 명예혁명과 한국의 1987년 민주화는 역사적 성격이 다르지만, 권력의 집중을 제한하고 의회의 역할을 강화했다는 점에서는 비교해 볼 만합니다.
1987년 이후 약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AI혁명입니다.
250년 전 영국 의회가 운하와 철도의 시대에 새로운 사업과 기존 권리 사이의 충돌을 조정했다면,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도 비슷한 역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AI와 기존 산업, 기업과 노동자, 기술혁신과 개인의 권리 사이에서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 입법활동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률안의 숫자보다 얼마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느냐일 것입니다.
저는 그 바탕에 의회에 대한 신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회가 신뢰받기에 합의가 가능하기도 하지만, 공정하게 조정하고 결정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의회에 대한 신뢰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국회는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국민은 정치를 비판하되 정치 자체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은 한 사람의 뛰어난 판단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결정하고 잘못된 결정은 다시 고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觀海
제 서재에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남겨두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천천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사행건樂 by 戒盈杯>
https://m.blog.naver.com/realguy81/22445704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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