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JOJO
2026.06.07.
확신은 있었다, 판단은 없었다 (ft.화에 대하여)
ㅡ타인을 해부하다 나를 발견했다
1.서론:관용은 미덕이 아니라 능력이다
나는 오랫동안 판단력을 갱신하는 문제를 탐구해왔다. 프레임을 인식하는 것, 분노 아래를 들여다보는 것, 상황에서 한 발 물러나 옆에서 바라보는 것. 그렇게 세 가지 조건을 쌓아왔다. 그런데 세네카를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 세 가지는 필요조건이었지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판단이 공정해지려면 네 번째 조건이 있다. 관용이다.
처음에 나는 이 단어를 가볍게 읽었다. 관용이라니. 미덕을 권고하는 고전적 수사처럼 들렸다. 하지만 세네카가 정의하는 관용은 내가 알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관용을 선의나 따뜻한 마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쓴다.
"관용이란 복수할 힘이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다." 힘의 문제다. 능력의 문제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관용이다.
그 문장 앞에서 나는 멈췄다. 그리고 나 자신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2.본론1. 첫째, 나는 확신은 있었지만 판단이 없었다
책을 읽으며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확신은 있어도 판단이 없는 사람들을 관찰해왔다. 처음에는 그것을 외부의 문제로 읽었다. 저 사람은 원칙이 없다. 저 사람은 처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저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런 관찰들이 쌓이면서 나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분석이 판단을 대신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관찰하던 자리에서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나도 평정심을 잃은 적이 있었다. 나도 처음의 약속과 다르게 행동한 순간이 있었다. 나도 말이 행동을 앞서간 적이 있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일은 불편했다. 타인을 관찰하는 것은 쉽다. 내 자신을 해부하는 것은 다르다.
세네카는 묻는다. 너는 항상 처음 약속을 지켰는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확신은 자기 정당화의 연료가 된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상대의 실패를 더 가혹하게 읽게 된다. 그 가혹함이 판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의 실패다.
왜냐하면 판단은 현상뿐 아니라 원인을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동정심과 관용을 구분하면서 정확하게 이것을 짚는다. "동정심은 현상만을 보지만, 관용은 이성적으로 원인을 살핀다." 상대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은 현상이다. 왜 어겼는가, 그것이 위선인가 아니면 한계인가, 그것이 원인이다. 원인을 살피지 않으면 판단이 아니라 단죄가 된다.
나는 단죄를 판단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아닐까.
3.본론2. 둘째, 원칙은 갈등이 생겼을 때 드러난다
갈등이 없을 때 원칙을 말하는 것은 쉽다. 나는 관용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평소에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갈등이 생겼을 때 드러난다. 처음 약속과 달라진 것이 실제로 나타날 때,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 때, 그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원칙의 실체다.
나는 이것을 품질안전환경팀장이라는 역할 안에서 자주 경험한다. 조직에서 약속은 자주 어긋난다. 프로세스는 말과 다르게 작동하고, 사람들은 처음 합의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때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분노로 반응할 것인가, 원인을 살필 것인가.
세네카가 말하는 관용의 정반대는 잔인함이다. 포악한 마음으로 벌을 주는 것. 그런데 그 잔인함이 대부분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냉소. 비아냥. 공개적 지적.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 이것들은 겉으로 판단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복수의 충동이 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충동.
"복수할 힘이 있으면서도 절제하는 것." 이 문장을 다시 읽을 때 나는 이 복수를 물리적 의미로만 읽지 않게 되었다. 상대를 언어로 제압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실패를 공론화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것. 상대의 모순을 지적해서 승리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일상의 관용이다.
모든 이를 용서하는 것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것만큼 잔인하다고 세네카는 경고한다. 관용은 무차별적 면죄부가 아니다. 그것은 구분을 전제로 한다. 위선과 한계를 구분하는 것. 의도와 결과를 구분하는 것. 반복된 패턴과 한 번의 실수를 구분하는 것. 그 구분이 이성적으로 원인을 살피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 없이 내리는 판단은 너그러워 보여도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다.
원칙은 편할 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할 때 지키는 것이다. 그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 관용이다.
4.본론3. 셋째, 크고 넓은 마음은 슬픔과 함께할 수 없다
세네카는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크고 넓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뒤에 뜻밖의 문장을 붙인다. "그런 마음은 슬픔에 잠긴 상태와는 함께할 수 없다. 슬픔은 마음을 산산조각 내고, 쓰러뜨리며, 위축시킨다."
나는 이 구절에서 예상치 못한 곳을 찔렸다.
나는 분노를 경계해왔다. 분노가 판단을 흐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슬픔은 다르게 대해왔다. 슬픔은 분노와 달리 내향적이고, 반성적이며, 조용하다. 그래서 슬픔을 성찰과 혼동했다. 실망이 깊어지고 기대가 무너질 때, 그 슬픔을 사유의 재료로 삼았다. 하지만 세네카는 그것을 경계한다. 슬픔은 마음을 위축시킨다. 위축된 마음은 크고 넓어질 수 없다. 그리고 크고 넓지 않은 마음은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이 판단력의 문제와 연결되는 이유는, 슬픔과 실망 속에서 내리는 판단이 필연적으로 자기 방어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내가 상처받았기 때문에 상대가 나쁘다. 내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상대가 잘못이다. 이 판단들은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원인을 살핀 결과인지, 아니면 내 상처의 반응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네카가 말하는 현자의 모습은 여기서 더 구체적이 된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평온하고 견고한 모습을 지킬 것이다." 평온이 먼저다. 평온 위에 판단이 선다. 흔들린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포장해도 그 흔들림을 담는다.
여왕벌에게는 침이 없다는 세네카의 비유가 여기서 다시 울린다. 자연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에게서 보복의 수단을 제거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설계다. 복수의 충동에서 자유로운 존재만이 진정으로 크고 넓은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것을 훈련 중이다. 실망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슬픔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도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슬픔이 찾아와도 그것이 판단을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평온을 지키는 것. 그것이 기술이다.
5.결론: 판단의 갱신은 나를 해부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판단력 갱신의 네 번째 조건을 얻었다. 프레임을 인식하는 것, 분노 아래를 보는 것, 옆에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관용이다. 관용은 이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능동적인 조건이다. 앞의 세 가지가 인식의 방법이라면, 관용은 실천의 방법이다.
관용은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네카는 말한다.
"관용은 타인을 아끼는 것 같아도 실은 자신을 아끼는 일이다."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를 보호한다. 분노와 단죄 속에서 내리는 판단은 그 판단을 내린 사람도 소모시킨다. 반면 원인을 살피고, 힘이 있어도 절제하고, 평온을 유지하며 내리는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타인을 해부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부의 끝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확신이 강할수록 타인을 더 쉽게 단죄하게 된다는 것, 처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나 자신도 그것을 지키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 분노는 경계하면서 슬픔은 성찰로 착각해왔다는 것.
관용은 용서가 아니다. 세네카는 분명히 구분한다. 현자가 행하는 것은 용서가 아닌 관용이다. 용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면제해주는 것이다.
관용은 원인을 살피고 무엇이 정의롭고 선한지를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그럽되 무른 것이 아니다. 원인을 보되 결과를 무시하지 않는다. 구분하되 단죄하지 않는다.
판단력을 갱신한다는 것은 결국 더 공정해지는 것이다. 공정해지는 것은 타인에게만 유익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다. 그 마음이 평온하고 견고하게 유지될 때, 비로소 나는 현상이 아니라 원인을 볼 수 있다. 위선과 한계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복수할 힘이 있을 때, 그것을 절제할 수 있다.
그 절제가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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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마이크로데이터
2026.06.07.
좋은 깨달음이네요. 세네카란 사람은 깊은 성찰을 한 사람같아요. 관용은 제압할 수 있음에도 절제하는 것. 멋진 표현같습니다. 근데 회사생활하며 이 관용이 때론 같은 배에 올라탄 동지의식으로 오인되기도 하더군요. 전 그래서 치명적 사건은 반드시 공론화하되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단계별로 잘못된 판단이 나오게 된 원인을 인터뷰하고 결론을 항상 전면에 배치한 후 조직과 개인이 그 결말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공론화시컸습니다. 매월 전 조직원 40명 정도가 모인 회의자리에서 발표하고 개선안을 준비하게 했었죠. 근데 그렇게 해도 개선은 더디기만 했었죠. 님의 시각과 고늬는 좀더 높은 수준의 통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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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JOJO
2026.06.07.
저도 부족한게 많은데. 겸손하지 못 한 마음으로 상대를 위에서 평가하기 바뻤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성찰과 앞으로의 방향은 확실하게 잡힌거 같아요. 항상 깊은 공감과 따뜻한 이야기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소통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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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2026.06.07.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많이 도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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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JOJO
2026.06.07.
도움이 되었다니, 감사합니다!
좋아요

정유표
2026.06.07.
좋은 글입니다. 세네카가 경계하라는 슬픔은 아마도 자기에 대한 슬픔, 자기 연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민이란 미덕도 우리가 꼭 갖추어 할 가치인데, 이게 자기를 향하면 오히려 독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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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JOJO
2026.06.07.
네 맞습니다. 저도 이렇게 깨닫고 또 금새 실수를 반복합니다.
글도 쓰고, 책도 내면서 좀 더 성숙해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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