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하는 하마
2026.08.19.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영화도 보고 미식도 경험하며 한량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직 준비로 제법 바쁩니다. AI에 관심이 많은 팀장님께서 클로드를 결제해주신 덕분에 관련 강의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능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는 제미나이에게 엑셀 함수를 물어보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툴 안에 클로드 자체를 탑재하여 스스로 작업까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DCF 밸류에이션 모델을 짜기도 하고, 연결재무제표를 분석해 시각화한 뒤 MBB 스타일의 깔끔한 보고서까지 뽑아내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기업의 내부정보는 빼고 돌려야겠지요^^
허나 경외감은 잠시였고, 곧 두려워졌습니다.
머지않아 제 직무가 사라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AI에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잘 다루는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술과는 협상할 수 없지만, 사람과는 경쟁할 수 있습니다.
재무와 회계는 특히 그렇습니다. 이 직무의 본질은 결국 데이터의 정합성이고, 대규모 데이터의 전처리와 대사(reconciliation)에서 인간이 프론티어 모델을 따라가기는 이제 어렵습니다. 속도도 그렇고, 단가도 그렇고, 지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수습 회계사들도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원인을 AI 하나로 단정할 생각도, 근거도 없습니다. 감사시장 위축이나 IPO 감소 같은 경기 요인이 더 크게 지목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다만, 방향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AI를 다룰 줄 아는 경력직 한 명이 신입 여러 명분의 산출물을 더 싼 값에 만들어내는 구조에서 가장 먼저 줄어드는 자리는 아직 숙련되지 않은 신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잔인하지만 이는 일반 기업의 채용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정년 퇴임 후 공허해하시던 모습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상실과 제 두려움은 종류가 다릅니다. 정년은 예고된 종료입니다. 날짜가 정해져 있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퇴장입니다. 반면, 대체에는 예고가 없습니다. 어느 날 조용히 제 업무 범위가 좁아져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뿌리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는 것(Fear of Missing Out). 저는 이것이 죽음 다음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두려움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 단어는 참 엉뚱한 곳에 붙어 있습니다.
FOMO, 즉 Fear of Missing Out이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주식시장입니다. 남들의 자산 가치가 상승하는 모습을 보며 벼락거지가 된 자신을 자조하듯 한탄하는 데 쓰이지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째, 남이 부자가 되는 것이 왜 제가 두려워할 일입니까
물론 반론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자산 가격은 상대적이어서, 서울 아파트가 오르면 제가 쥔 현금의 구매력은 실제로, 서서히 깎입니다. 그 점에서 자산 FOMO가 전부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론이 이상합니다. 구매력이 깎였다면 대응은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자산을 사거나, 소득 창출력을 키우거나. 그런데 대부분의 논의는 첫 번째에만 머물고, 그마저도 "사야 한다"는 판단이나 시드 머니를 모으는 노력이 아니라 "쟤는 샀는데 나는 못 샀다"는 감정에서 멈춰 섭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달은 내 소득과 역량이고, 손가락은 남의 수익률입니다.
둘째, 정작 두려워해야 할 곳은 본업 아닙니까
투자 재원은 대부분 근로소득에서 나옵니다. 근로소득이 위태로우면 투자 활동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원금이 사라지는 판에 수익률을 논하는 격이지요. 그런데 이쪽을 향한 공포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노를 젓는 일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남의 수익률을 부러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새 도구를 익히고 자기 직무를 재설계하는 데에는 시간과 실패가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값이 싼 쪽을 고릅니다.
고민해볼 만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주식시장에서 FOMO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고과에서 A를 받지 못했을 때 같은 강도의 공포를 느끼는 직장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 학창시절 학업에서 뒤처졌을 때 FOMO를 느껴본 적이 있기는 할까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관찰입니다.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이 '투자만'잘할리 없습니다.
단, 그 차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두려움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할 때에만 두려움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남의 결과를 향하면 그것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일 뿐입니다. 가짜 FOMO는 감정만 소비하고 끝나지만, 진짜 FOMO는 반드시 행동을 낳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움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남의 계좌를 들여다보는 대신 제 직무를 보며 역량을 강화할 것입니다. AI가 못 하는 일을 찾아 숨는 것이 아니라, AI에게 제대로 시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쪽을 봅니다. 숫자 마사지는 Ai가 하더라도 최소한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결론은 제 몫이어야 할겁니다. 재무의 가치는 숫자를 만드는 손에서 숫자를 판단하는 눈으로 옮겨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철학과 인문학 공부도 해볼까합니다.
물론 틀릴 수도 있어서 검증 방법도 함께 정해두었습니다. 6개월 뒤에 적어볼 생각입니다. 클로드에게 위임한 업무의 비중이 얼마나 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위임만 늘고 채운 것이 없다면 제 가설이 틀린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지금 바람은 제 쪽으로 불지 않고, 기다린다고 방향이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를 젓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라도 저읍시다.
https://www.sedaily.com/article/20080623?ref=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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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

부동산마이크로데이터
2026.08.19.
대단한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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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김여사
2026.08.19.
며칠 안보여서 어딜 가셨나 했는데 휴가중이었군요. 역시 명문입니다. 배울점이 참 많은 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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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2026.08.19.
앗 하마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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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2026.08.19.
글이 너무 좋고 교훈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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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
2026.08.19.
이제 곧 돛을 펼칠 때가 오시겠네요! 화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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