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언
2025.08.06.
계획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변화를 흡수할 수 있는,
다소 흔들릴 뿐,
부서지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한강의 기적’은 국민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국민적 역량이 현실로 구현되기까지는,
이를 적용하려 노력한 정부 기관의 역할 또한 결정적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가 경제의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한 컨트롤타워로써,
‘경제기획원’이라는 독립된 정부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단순한 정책 기획 부서가 아니었으며,
각 부처의 예산, 정책, 대외 경제 전략을 종합적으로 조정하는 중심 축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곳간 열쇠’를 도맡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핵심 기관이었던 것입니다.
경제기획원은 수십 년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통해 산업화, 수출주도 성장, 도시화 등을 계획적으로 실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994년 경제기획원의 해산 이후,
이러한 장기 전략의 체계적 기획과 조정 기능은 사라졌고,
그 공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각각 예산, 세제, 통화 정책 등을 통해 경제 정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물가와 환율 같은 매크로 변수에 집중하고 있고,
기획재정부는 연간 예산 편성과 중기재정계획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대부분 단기 대응 중심의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그 이행을 감독할 중앙 조정기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외생변수와 정치 일정에 따라 흔들리는,
단기 위주의 경제 정책에 의존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전쟁 상태인 분단국가이며,
에너지, 원자재, 식량, 기술, 금융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5년 단임제라는 정치 시스템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큰 틀을 흔들 수 있는 불안정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장기 정책 수립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불확실성을 높이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기 계획은 더욱 절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큰 국가일수록,
‘그대로 실행하는 계획’이 아니라,
‘변화를 흡수하는 구조로서의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계획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계획조차 없다면, 방향도 없는 셈입니다.
장기 전략이란 단지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방향성과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작업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책의 내용 자체보다,
‘계획이 사라지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어떠한 리더십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위에 설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체된 정권에 좌우되지 않는,
국가 경제 전략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장기 전략의 부재로 인한 문제는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동산 정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2018년에 발표된 3기 신도시 정책은,
남양주왕숙, 하남교산, 인천계양, 고양창릉, 부천대장 등,
수도권의 대규모 택지 개발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입주자 모집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2025년 현재까지 대부분의 지역은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 착공 물량은 전체 공급 계획 18만5796가구 중 약 4.4%에 불과합니다.
입주가 가장 빠른 인천계양조차 2026년 12월로 예정되어 있으며,
부천대장은 2027년, 하남교산은 2029년 입주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후속 지구인 광명시흥 등은 아직 토지 보상 절차도 시작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는 단순한 일정 지연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도화되지 않은 장기 계획이,
얼마나 쉽게 정치적 환경과 정책 변경에 의해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입니다.
사전청약자의 이탈, 본청약 포기, 분양가 인상 등의 현상은,
공급 일정을 반복적으로 변경해 온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업성 악화, 토지 보상 갈등, 군부대 이전 지연, 송전선 이설, 멸종위기종 발견 등,
다양한 돌발 변수는 사업 전반에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하고 일관된 기준 아래에서 실행할,
‘제도화된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점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 정부는 3기 신도시 용적률 상향 등 추가 공급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따른 기반시설 재조정이 다시 지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방정부, 공공기관, 주민, 시공사 간 협의가 불완전하며,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사업 추진이 늦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택 정책의 혼란은 장기 계획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계획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과거 정권들도 장기 전략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국가발전비전 2025’,
노무현 정부의 ‘비전 2030’,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5개년 계획’과 ‘747 플랜’,
박근혜 정부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 이행계획’ 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획은 정권 교체와 함께 중단되었으며,
일부는 실질적 이행 없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장기 계획의 외형은 존재했지만,
계획 간 연속성과 실행력은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단기 플랜에 머무르는 경향만 강화된 셈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권의 강한 리더십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이 아닙니다.
어떠한 리더십 아래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
제도화된 장기 계획의 전략적 구조가 필요합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되는 국가적 목표,
각 부처가 공유하는 일관된 정책 프레임,
그리고 이를 재정과 연결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합니다.
장기 전략은 정권이 실현할 업적이 아니라,
국가가 지켜야 할 기준선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정책 혼란은 단지 계획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획이 이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 전략을 소모품처럼 다뤄서는 안 됩니다.
계획이 있는 나라,
그리고 그 계획이 지켜지는 나라만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다시,
‘기적을 이루는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기 대응이 아닌,
시대 흐름에 변하고 적응하되 부서지지 않는 계획 구조입니다.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54385473&code=11151500&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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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

소녀시대
2025.08.06.
글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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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훈
2025.08.06.
매우 유익한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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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섭
2025.08.06.
깊이 있는 글을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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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김여사
2025.08.07.
오랫만에 분석글 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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