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
2026.08.21.
'사회연대경제' 역시 산업혁명기부터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비판받았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주의 사상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노동자 협동조합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당시에도 많은 협동조합이 들어섰지만, 소비자 협동조합 외에는 금방 파산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베른슈타인은 그 원인으로 노동자 협동조합이라는 조직 자체의 까다로움을 지목했다. 노동자 협동조합은 뛰어난 지도부와 경영자, 자율적인 협동 문화가 고루 갖춰져야만 성공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현대에 협동조합을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도 공통으로 지적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국가 단위의 실패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협동조합처럼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는 기업은 아니지만, 대신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선출하는 기업으로 이뤄진 시장경제를 만들려고 한 곳이 있다. 바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정부 개입이 최소한으로 줄어든 시장경제를 만들려고 했다. 이 때 그 시장경제에는 자본가와 주식회사가 사라지고, 공기업과 노동자의 자주 관리 기업만 남아야 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핵심을 국가 소유도, 자본가 소유도 아닌, 사회적 소유로 정의했고, 그 정의에 따라 거의 모든 기업에서 노동자의 발언권을 크게 키웠다.
한 때 유고슬라비아 모델은 미국식 자유방임 경제도 소련식 명령 경제도 아닌, 성공적인 제3의 모델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초반에는 꽤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면서 비교적 낮은 소득 격차를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어디까지나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한 채 인민을 영도하는 국가였다. 노동자들은 여러 후보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었지만, 그 후보는 공산당이 인정하거나 공산당 간부와 가까운 사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동자들에게도 공산당과 가까운 사람을 선출하는 편이 이익이었다. 그래야 당으로부터 보조금 같은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노동자 자주 관리는 유능한 경영자가 아니라 정치적 네트워크가 두터운 경영자를 선출해서 공공 재정을 받아내는 경제 질서로 변질되었다. 공산주의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야노쉬 코르나이에 따르면 그렇다.
한 지역에서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정당이 있고, 사람들은 그 정당의 지도부와 가까운 사람을 선출해서 혜택을 받으려 한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 지방자치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연대경제는 지역 정치인과 결탁해서 중앙 또는 지방정부 예산을 타내는 보조금 사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사회연대경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
유럽 사회연대경제의 역사는 멀게는 중세시대의 코뮌과 기독교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대한 엄격하게 출발선을 잡아도 2세기 전 산업혁명기의 실험적인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만큼 유럽인은 지역 단위 또는 같은 계급 단위로 공동으로 생활해 본 역사가 길다. 그럼에도 협동조합 등은 좌우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았다.
간혹 우리나라도 전근대부터 '계' 같은 마을 단위 협력체가 있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협력이 산업화를 견디고 살아남아서 정치 운동으로까지 발전한 적은 없다. 그래봐야 동학 같은 반동적이고 전근대적인 종교 운동이 전부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의 '협력'이란 유럽인이 추구한 것과 같은, 평등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에 따른 협력과 거리가 멀다. 초등학생조차 한 살 단위로 위계를 따지는 나라에서, 어디서 주워들은 교양서적, 유튜브 이야기로 어린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걸 즐기는 나라에서, 서로를 동등한 시선에 두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며 생산과 혁신을 이룰 수 있을까.
사회연대경제의 의도는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적일지 몰라도, 그 실제 결과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유능한 금융인과 시장 경쟁의 힘을 신뢰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시선에서 보면,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이란 공공 재정과 기업이 창출한 부로 소수의 유유자적한 전원 생활을 부양하려는 시도로 보일 뿐이다.
생산은 기존 기업에 맡겨도 된다. 노동권 방어 차원에서 노동이사제를 확대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지만, 협동조합 등 대안 경제 조직을 국가 정책으로 육성해야 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히려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또 다른 기생 집단을 키우게 될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시선에서 볼 때, 정부는 세금과 공적 투자, 지분 공유를 통해 시장 경쟁이 창출하는 부를 적절하게 흡수하고 공정하게 나누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이 때 공적 투자와 지분 공유는 선출 정치인이나 행정 관료가 아니라, 경쟁에 노출된 채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공공부문의 금융인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지역에 뿌리 내린 선출 정치인과 행정 관료가 어느 집단에 보조금을 줄지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부패와 지대 추구의 싹이 자란다. 장기적이고 전국적인 산업 정책을 제외하면, 선출 정치인과 행정 관료는 공공부문 금융인들의 부패를 감독하는 데만 주력해야 한다.
이미 잘 기능하고 있는 공공부문 금융기관들을 놔두고, 해외에서도 성과를 의심받는 데다가 우리나라 조건에 맞지 않는 대안적 제도를 시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사회주의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비판받은지 오래다. 그런 점에서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이 통과된 것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입장에서도 우려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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