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
2026.08.10.
주간조선 칼럼 8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생각
박정희 이름만 꺼내면 극우 소리를 듣는다. 무릎을 망치로 때린 것 같다. 항상 강조하지만, 전통적인 자유주의 사상에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존속 또는 공공의 이익보다 앞에 있지 않다. 나란히 있거나 뒤에 있다. 자유란 결국 사람이 모여살고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 19세기에 활약한 동시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대부분 사회의 존속, 공동의 번영, 공공의 이익, 공공의 질서를 자유보다 앞에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애덤 스미스는 국가안보를 자유무역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실제로 국가안보를 위한 무역제재에 적극 찬성했다.
자유는 사회 속에 있다. 특히 사회 전반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정부가 없다면, 자유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정글 속에 혼자 살고 있다면, 자유에 대해 논의할 이유도 없고 논의할 사람도 없다.
"영국의 고전 정치철학자들은 (...) 철학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평등과 같은 자유 이외의 목표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를 다른 가치와 상충되는 만큼 제한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또는 심지어 자유 자체를 억제할 태세마저 갖추고 있었다."
-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박동천 역, 아카넷, 2019.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성역화를 비판하는 자칭 자유우파를 보면, 역으로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성역화하려 한다. 전쟁 중 적에게 이로운 가짜 정보를 살포하는 일이나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나 유튜브 쇼츠에서 동성애가 아름답게 묘사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칭 자유우파에게 물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자유와 질서는 한몸이고, 따라서 질서를 해칠 자유까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
(혹시 몰라서 이야기하지만, 동성애 표현이 질서를 해치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난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한다.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면, 시민결합이라도 추진하기를 원한다.)
같은 맥락으로, 시위와 집회의 자유 역시 질서 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전장연의 대중교통 불법 점거, 일부 청년과 부정선거론자의 올림픽 공원 무단 점거, 대진연의 미군기지 급습은 모두 정당하게 제한되고 처벌받을 수 있는 공공질서 침해다.자유를 남용하는 사람은 우파든 좌파든 상관 없이 자유의 적이다. 전통적인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자유주의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정당하게 규제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자유인가 규제인가가 아니다. 어떤 표현을 왜 규제해야 하는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표현을 규제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다.
많은 사람이 특정 정치인이나 약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처벌하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욕이 잠잠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더 강한 모욕, 말이 아니라 행동, 인터넷이 아니라 현실 속 폭력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어떤 욕구를 무한정 억압해서 좋은 결과가 일어난 적은 거의 없다.
영국 내무부 산하 반극단주의 위원회도 같은 우려를 공유한다.
“만델라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압력솥의 안전 밸브에 비유했다: 만약 사람들이 평화롭게 불만을 목소리로 낼 수 없다면, 그들의 분노는 다른 방식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의 통찰력은 단순하지만 심오했다: 정부가 평화로운 표현을 억압할 때, 민주주의에 전념하는 사람들조차 폭력을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로 여길 수 있다.”
하나의 칼럼에 이런 맥락까지 모두 실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당장의 만족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정책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을 처벌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일베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이 훗날 폭력적인 우파 극단주의를 키우게 되면, 일베를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 훗날 노무현 재단이나 노동조합을 노리게 된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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